책소개
우리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
≪속일본기≫는 697년에서 791년까지 95년간의 역사를 40권의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2년간의 역사를 1권 가까운 분량으로 서술한 셈이다. 이 사서는 797년에 완성된 동시대의 사료다. 그래서 비교적 상세하게 8세기의 일본사를 복원할 수 있다. ≪속일본기≫에는 신라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신이나 발해가 일본에 파견한 사신에 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대한 기술이 적고, ≪속일본기≫의 신라 사신에 대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속일본기≫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한국 고대사 사료를 보충할 수 있는 사서다.
≪삼국사기≫를 통해 신라사라는 숲을 볼 수 있는 정도라면, ≪속일본기≫를 통해서 일본 고대사라는 숲 속의 나무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지역적인 차이는 존재하지만, 이웃 나라의 역사를 읽으면서 거꾸로 한국 고대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속일본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적잖은 도움이 되는 문헌이다.
어려운 현실과 정치 격변 시기의 기록
제21권부터 30권까지는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758년) 8월부터 보귀(寶龜) 원년(770년) 9월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이 시대의 초기에는 여전히 천하태평을 꿈꾸며 천평(天平)이라는 연호에, 길조라고 여겼던 여러 가지 현상들을 덧붙여 사용했다[천평보자(天平寶字), 천평신호(天平神護)]. 이후에도 그러한 경향은 계속되었다[신호경운(神護景雲), 보귀(寶龜)]. 그러나 사람들이 자연 현상에 의지하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어려웠기 때문일 수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정치적 사건은 순인천황(淳仁天皇)의 즉위, 등원중마려(藤原仲麻呂)의 난, 효겸(孝謙)의 중조(重祚), 도경(道鏡)이라는 승려의 집권, 광인(光仁)의 즉위를 들 수 있다.
일본 고대사 전공자의 전문적 번역
≪속일본기≫를 번역한 역자 이근우는 일본 고대 사료를 연구하고 번역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 학자다.
우리 학계는 ≪일본서기≫나 ≪속일본기≫와 같은 일본 고대 사료에 대한 학술적인 번역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일본서기≫의 한국 고대사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역시 일본 고대사 전공자에 의한 본격적인 번역은 없는 상태다. ≪속일본기≫의 출간으로 우리 학계의 학술적 진전이 이루어졌다.
200자평
문무천황(文武天皇)의 즉위부터 시작하여 환무천황(桓武天皇)의 연력(延曆) 10년까지 9대, 95년간(697∼791)에 대하여 기록한 40권 분량의 관찬(官撰) 사서(史書)다. 그 속에는 내량시대(奈良時代, 710∼784) 전 기간이 포함되어 있다. 동시대에 기록한 사료로서 상세하게 일본사를 복원할 수 있다.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자료들도 들어 있어 우리의 고대사 연구에 적잖은 도움이 된다.
지은이
791년 사서 편찬의 칙명을 받은 우대신(右大臣) 후지와라노쓰구타다(藤原繼繩)가 7년에 걸쳐서 광인천황대(光仁天皇代)에 정리된 사료에 첨삭을 가하고 그 후의 기사를 새로이 추가했다. 전체 40권의 정사는 두 차례로 나누어 헌상되었다. 후반부 20권은 후지와라노쓰구타다의 이름으로 796년에 헌상되었으며, 전반부 20권은 797년 봄에 당시 황태자학사였던 스가노노마미치가 헌상했다.
≪속일본기≫를 최종적으로 찬진(撰進)한 인물로 스가노노마미치·아키시노노야스히토(秋篠安人)·나카시나노코츠오(中科巨都雄)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한반도계 씨족 출신이었다. 스가노노마미치는 환무천황의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환무천황의 인척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속일본기≫의 편찬에 깊이 관여했다.
옮긴이
이근우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거쳐 한국학대학원 사학과 석·박사과정을 졸업했으며, 다시 일본 교토대학 일본사 교실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 재직 중이며, 부경대학교 박물관장·인문사회과학연구소장을 거쳐, 대마도연구센터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관심 분야는 고대 한일 관계사, 한국 고대사, 일본 고대사이며, 현재는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속일본기(續日本紀)≫, ≪영의해(令義解)≫ 등 일본 고대의 사료를 번역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고대왕국의 풍경≫(인물과 사상사, 2006), ≪전근대 한일 관계사≫(방송대 출판부, 2007), ≪전통사회의 이해≫(방송대 출판부, 2008), ≪부산과 대마도의 2000년≫(국학자료원, 2010) 등의 저서를 집필했고, ≪일본사상사≫, ≪주자학과 양명학≫, ≪일본서기 입문≫, ≪침묵의 종교 유교≫, ≪지의 윤리≫, ≪지의 현장≫, ≪고구려의 역사와 유적≫ 등 다수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대표 논문으로는 <桓武天皇의 母系는 武寧王의 後孫인가>(2002), <王仁의 千字文·論語 일본 전수설 재검토>(2004), <日本書紀에 보이는 五經博士와 吳音>(2010) 등이 있다.
차례
권 제21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 8월부터 12월까지
권 제22 천평보자(天平寶字) 3년 정월부터 4년 6월까지
권 제23 천평보자(天平寶字) 4년 7월부터 5년 12월까지
권 제24 천평보자(天平寶字) 6년 정월부터 7년 12월까지
권 제25 천평보자(天平寶字) 8년 정월부터 12월까지
권 제26 천평신호(天平神護) 원년 정월부터 12월까지
권 제27 천평신호(天平神護) 2년 정월부터 12월까지
권 제28 신호경운(神護景雲) 원년 정월부터 12월까지
권 제29 신호경운(神護景雲) 2년 정월부터 3년 6월까지
권 제30 신호경운(神護景雲) 3년 7월부터 보귀(寶龜) 원년 9월까지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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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무신, 견발해사(遣渤海使) 소야조신전수(小野朝臣田守) 등이 당국(唐國)의 소식을 아뢰기를, “천보(天寶) 14년(755) 세차(歲次) 을미 11월 9일,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 안록산(安祿山)이 반역해서 병사를 동원해 난을 일으키고, 스스로 대연(大燕) 성무황제(聖武皇帝)라 칭했습니다. 범양(范陽)을 고쳐서 영무군(靈武郡)이라 하고, 그 집을 잠룡궁(潛龍宮)이라 하고, 연호를 성무(聖武)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 안경서(安卿緖)를 머무르게 해서 범양군(范陽郡)의 일을 맡게 하고, 스스로 정병(精兵) 20여만 기병을 이끌고 길을 열어 남쪽으로 갔습니다.
-41~42쪽
을사, 태사(太師) 등원혜미조신압승(藤原惠美朝臣押勝)의 역모가 폭로되었다. 고야천황(高野天皇)이 소납언(小納言) 산촌왕(山村王)을 보내 중궁원(中宮院)의 영(鈴)과 인(印)을 거두어들이게 했다. 압승(押勝)이 그것을 듣고 아들 훈유마려(訓儒麻呂) 등을 보내 기다려서 그것을 빼앗게 했다. 천황이 수도소위(授刀少尉) 판상예전마려(坂上苅田麻呂), 장조(將曹) 모록도족(牡鹿嶋足) 등을 보내 활을 쏘아 그를 죽였다.
-208~210쪽
적신(賊臣) 중마려(仲麻呂)는 외척의 가까운 신하로서, 선대[先朝]에 등용되었다. 위임하기로 정하고 다시 의심하지 않았다. 그 화역(禍逆)의 뜻을 속에 감추고 짐새[鴆]의 독과 같은 해악으로 천하에 물들게 하고 사람과 신의 마음을 범해서 노하게 하니, 어찌 그를 원망하는 기운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신령이 나라를 보호하고 바람과 비가 군사를 도우니 10일이 되지 않아 모두 주륙할 수 있었다. 지금 근본적인 악을 이미 없애고 한결같이 선으로 돌아가게 해, 지나간 잘못을 씻고 만물과 함께 다시 새로워지고자 한다. 연호를 고쳐서 천평보자(天平寶字) 9년을 천평신호(天平神護) 원년으로 해야 할 것이다.
-247~248쪽